•“저는 신부님을 전부터 쭉 속여 왔습니다. 들어 주시는 겁니까? 신부님이 저를 경멸하셨다면…… 저 역시, 신부님도 동료 신도들도 미워하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성화도 밟았습니다. 네, 밟고말고요. 모기치나 이치소우는 강하지요. 나는 그렇게 강하지 못한 걸 어쩝니까?”
파수꾼이 견디다 못해 몽둥이를 쥔 채 밖으로 나오자 기치지로는 도망가면서 계속 소리쳤다.
“그렇지만 제게도 할 말이 있어요. 성화를 밟은 자에게도 밟은 자로서의 할 말이 있어요. 성화를 제가 즐거워서 밟았다고 생각하십니까? 밟은 이 발은 아픕니다, 아파요. 나를 약한 자로 태어나게 하신 하나님이 강한 자 흉내를 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건 무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건 억지이고말고요.” -177쪽
•신부는 발을 들었다. 발에 저린 듯한 무거운 통증을 느꼈다. 그것은 단순히 형식만은 아니었다. 지금까지 자신의 전 생애를 통해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해 온 것, 가장 맑고 깨끗하다고 믿었던 것, 인간의 이상과 꿈이 담긴 것을 밟는 것이었다. 이 발의 아픔. 그때, 밟아도 좋다고, 동판에 새겨진 그분은 신부에게 말했다.
밟아도 좋다. 네 발의 아픔을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 밟아도 좋다. 나는 너희에게 밟히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고, 너희의 아픔을 나누기 위해 십자가를 짊어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신부가 성화에 발을 올려놓았을 때 아침이 왔다. 닭이 멀리서 울었다. -2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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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십여 년 전, 홍성사에서 출간된 종교서적이다.
순교서적, 기독교서적, 신앙서적이라고도 분류되는데 일본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고전으로 이해하고 있다.
어릴적 가톨릭 세례를 받고 가톨릭 가정에서 자란 저자는 해외 유학을 거쳐 작가의 삶을 살게 된다.
본인의 경험, 생각을 토대로 일본과 대항해시대의 접점을 찾아 흥미로운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무교 또는 비기독교인이 읽어도 쉽게 빠져들 수 있는 소재라고 생각된다.
일상에서 부딪히는 하나님의 '침묵'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의구심을 갖게 만든다.
결국 이천여년 전 예수가 껍데기만 남은 율법의 틀을 깨뜨렸듯이, 주인공 로드리고 신부는 더 이상 형식과 양식에 구속받지 않고 더욱 깊은 신앙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선교, 순교, 배교라는 민감하면서 친숙한 소재를 갖고 다양한 캐릭터들을 통해 입체적으로 상황을 풀어나간다.
섬나라 일본의 잔잔한 풍경과 17세기 대항해시대의 극변기가 잘 어우러져 있다.
책 속에서 '침묵'이란 단어가 백여번 등장하는 듯 하다. 주로 주인공의 입, 생각을 통해서 강조되는데, 결말에서는 이 단어의 의미가 확장되며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하게 된다.
두껍지 않은 작품이나, 잔잔한 여운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