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나는 그의 형제를 업무 상 만난 적이 있다.
차인표를 제외한 다른 두 형제는 서울대를 갈 정도로 전국 수재였다고 들었다.
아버지인 중견기업 회장으로부터 이혼 후, 그의 어머니와 삼형제는 자신들의 길을 찾은 듯 하다.
그 당시에 대해서 차인표는 자세히 얘기하지 않는다.
다만 그 어머니가 신학교에 진학하여 미국으로 신학 대학원 박사 과정까지 완료했다 정도만 언급한다.
그래도 부를 가졌던 아버지 덕분에 네 모자가 굶어죽지는 않을 것이라 추정한다.
그의 이삼십대는 드라마 주연배우 생활로 뜨거웠지만,
그 안에는 다른 꿈이 자라나고 있었다.
기독교 신자였던 그는 신애라와 가정을 이루며, 뒤늦게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다고 간증한다.
아버지와는 달리, 그는 그 가정을 더 소중히 책임감으로 가꾸었고 심지어 두 아이를 입양하며 사랑을 실천했다.
알라딘 홈피에서 발췌한 책 속의 문장들은 다음과 같다:
>>>
“레디! 액션!”
우리 왜군들은 배에서 뛰어내려 갯벌을 가로질러 달리기 시작했다. 넘어지는 놈, 미끄러지는 놈, 자빠진 놈 위로 또 자빠지는 놈 등등, 정말 아비규환이었다. 나도 곧 넘어갈 것 같은 숨을 헐떡이며 열심히 갯벌을 가로질러 육지를 향해 뛰었다. 갯벌을 다 가로질렀다 싶었는데 ‘컷’ 소리가 들렸다.
“컷, 컷, 컷! 그래, 잘했어. 지금이랑 똑같이 한 번 더 하는 거야. 알았지? 자…… 왜군들 원위치!”
나는 그날 처음 알았다. 이 세상의 모든 말 중 가장 무서운 말이 ‘원위치’라는 것을……. 얼마나 열심히 달려 왔는데…… 원위치라니. 앞만 보고 달려왔는데 원위치라니. 그 세 글자에 백 명이 넘는 왜군들은 다시 방향을 틀어 갯벌을 지나 배를 향해 질퍽거리며 나아가야 했다. 촬영은 끝없이 반복되었다. 함성이 적다고 원위치, 너무 많이 넘어진다고 원위치, 카메라 배터리 나갔다고 원위치.
나는 그날 열심히 달렸다. 조선을 침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내 아들 태평이를 위해서 숨이 넘어갈 만큼 달렸다. 달려도 달려도 원위치되는 이 지친 인생을 이겨내고 내 아들 태평이와 함께 살 방 한 칸을 마련하고자 갯벌 위를 하루 종일 목숨 걸고 달렸다.
_2장 「45인승 버스」 중에서
평생을 남이 떼인 돈을 받아다 주며 먹고살아온 내가, 헌 삶을 정리하고 새 삶을 시작하는 시
점에서 내가 떼인 돈을 받으러 다니게 된 것은 어쩌면 오래전부터 정해진 나의 운명일는지도 모른다. 쫓아다니면서도 보출이가 잡히지 않기를 바라는 이유는 보출이가 잡히는 순간 나의 영
화가 끝나버릴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이다. 영화가 끝나기 만을 문턱 에서 기다리고 있는 딸의
죽음이 보이기 때문이다. 역설적이지만 굳이 비유를 들자면, 42.195 킬로를 다 달려 지치고 피곤하지만 결승선 뒤에 기다리는 누군가가 두려워 결승선이 끝없이 멀어지기를 바라는 마라토너 같다고나 할까. 그 누군가가 없었다면 알 파치노가 늙은 대부가 되지 못했듯, 보출이가 없으면 박대수는 병든 딸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무능한 아빠로 돌아가고 말 것이다.
_3장 「건널목」 중에서
“아저씨, 안 아파요?”
“응? 뭐가? 뭐시 아파?”
“내가 지금 아저씨 그림자 밟고 있잖아요. 진짜 안 아파요?”
“으응, 그래, 아프네. 많이 아퍼.”
태평이가 배를 잡고 까르르르 웃더니, 콩콩 뛰며 더 세게 밟는다. 길게 드리운 내 그림자가 아파서 운다.
수은등 불빛이 태평이와 나의 머리 위로 살금살금 떨어져서 우리 둘의 머리를 노랗게 물들인다.
“아저씨, 그림자는 누가 만들었게요?”
“응? 그림자는 사람이 만들었지. 사람이 있어야 그림자도 있으니까.”
“땡! 그림자는 빛이 만든 거예요. 빛이 비춰줘야지 그림자가 생기잖아요. 빛 없는 깜깜한 밤에는 아무 그림자도 없잖아요.”
늘 느끼는 거지만 아이가 어른보다 똑똑하다. 왜 그럴까? 어른이 더 많이 배웠는데.
_3장 「물총싸움」 중에서
>>>
그의 소설의 엔딩은 따뜻하다.
기독교 신자인 그가 바라보는 세계관 그리고 그가 독자에게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잘 전달된다.
무신론,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신생 종교들 속에서 그의 신앙이 더 돋보인다.
조수빈 아나운서의 유튜버 채널에서 그와의 인터뷰가 3부작으로 올라와있는데,
그의 깊이 있는 생각을 엿볼 수 있다.
그가 원하는 바는 한국 문학사의 큰 획을 남기겠다는 원대한 포부가 아니며,
글을 좋아하는 그래서 글을 쓰기 시작한 사람들과 함께 무언가를 해보고 싶다 정도이다.
자신의 포지셔닝, 재능, 잠재력과 한계를 명확히 알고 있는 반백세의 바름직한 모습이다.
올해 개정증보판으로 새로운 제목 ‘그들의 하루’ 하에 베스트셀러가 되었다고 한다.
나는 알라딘 중고서점을 통해 초판을 읽어보았다.
어떤 제목이던지 저자는 ‘하루’ 그리고 ‘오늘’의 의미를 전달하고 싶어한다.
비참하고 어둡고 막막해도, 오늘 하루만 최선을 다 해보자.
그 하루들이 쌓여서 결국 선을 이루리라는 그의 바람(또는 성경의 말씀)이 담겨 있다.
크리스마스 연휴에 하루 만에 기분 좋게 읽어내려갔다.
내가 장편 소설을 읽은 건 정말 몇 년만의 일이다.
그만큼 나 스스로도 소설을 음미할 여유가 없었던 것 같다.
무작위, 무신론, 무용론 등 의식의 흐름대로 밀려가는 이 시대상 속에서
차라리 굳은 믿음을 갖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인물들이 더 멋있어 보인다.
차인표, 션, 이영표, jk김동욱 등 크리스쳔임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아름답다.
목회자가 아니더라도 각자의 현장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조금이나마 보여줄 수 있다.
이제는 성탄절,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표현마저 광고에서 사용하지 않는 (또는 못 하는) 시대이다.
해피 홀리데이 등 두리뭉실한 표현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가리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얻는 이득이 무엇인지 알 수 없으나, 이 시대에 휩쓸려가지 않는 용기와 지혜도 필요하다.
기독교는 억압할 수록, 더 확산되었고 그 빛을 발휘했다.
기독교를 금지하는 국가로는 중국, 북한 등 독재국가들이 대다수이다.
역사를 깊이 알면 알게 될수록, 기독교의 놀라운 기적을 확인할 뿐이다.
나도 아마도 차인표와 비슷한 길을 향해 나아갈 듯 하다.
마흔 초반에서야 주님의 길이 무엇인지 조금씩 깨닫고 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