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내가 지난 2년간 열심히 다닌 두레교회의 담당목사 저서를 이제서야 읽게 되다니.
예전부터 읽으려했지만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실행에 옮기지 못 하였다.
교회 내에 두레도서관에서 이 책을 대여하였다. 도서관에 유익한 종교/교양 서적이 많아 앞으로 애용할 생각이다.
이틀 동안 퇴근 후 밤늦게까지 열심히 읽었다. 최근에 이렇게 몰입해서 읽는 책은 거의 없었다.

내가 선택한 책은 100쇄 기념판이었는데, 그냥 책표지만 조금 업그레이드되었고 책내용은 변한 부분이 없다.
100쇄 기념에 큰 의미가 있다고 본다. 70년대 개척교회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책이며 이는 한국 사회/교회의 산 역사이다.
내가 읽은 기독교 서적 중에 가장 솔직하고 적나라하다. 대부분의 서적은 하나님의 사랑/찬양/기쁨에 치중하지만, 이 책은 우리 인간의 나약함/죄/한계를 통해 예수님의 사랑을 보여주고 있다. '~때문에(because of)'의 신앙이 아닌 '~임에도 불구하고(in spite of)'의 신앙을 그려내고 있다고나 할까. 한국 교회가 맞닥뜨린 우리 사회의 현실과 앞으로 한국 교회가 나아가야 할 길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이로 인해, 한국 교회가 반성해야할 부분이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책의 앞부분은 신앙에 대해 고뇌하는 철학과 학생의 모습을 담담하게 그려낸다. 철학을 전공한 목사님은 끊임없이 자기 안에서 완벽한 논리를 찾으려 불교에도 입문하고 넝마주의 삶도 체험한다. 진리란 무엇이며 삶의 의미를 애타게 찾는 과정이 상세히 그려진다. 그는 당시 효봉 스님이 입적할 때 외친 '무(無)'란 한마디에 자신의 인생이 아무 것도 아니어서는 곤란하다는 생각과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할 경지에 오를 마음이 없음을 스스로 확인하고 불교와 멀어진다. 피투성(避投性)의 존재인 그는 자기 인생에서 자기 자신을 한 번 던질 수 있는 기회(企投性)을 찾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와 같이 성경공부를 한 홍응표 선배의 지적이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김 군은 형이상학과 변증법을 거론하는데 알다시피 형이상학의 결론이 무엇인가? 플라톤 이래 금일에 이르기까지 형이상학이 걸어온 자취가 어떠한가? 한마디로 다람쥐 쳇바퀴 돌기가 아닌가? 노상 제자리만 맴돌았단 말일세. 변증법은 어떤가? 변증법을 집대성한 헤겔의 경우를 보자구. 헤겔이 말하기를 이 세계는 '세계정신(Welt Geist)의 자기 발전의 과정이다. 이 세계정신의 변증법적인 발전이 역사의 전개이다'고 했는데, 그것이 어쨌다는 건가? 세계정신, 벨트 가이스트란 도대체 뭐냔 말이야. 하나님이란 말인가, 부처님이란 말인가, 아니면 사상가의 사상체계란 말인가? 극언하기는 뭣하지만 부질없는 사변이요, 언어의 유희야. 자네 헤겔의 업적이 무엇인지 아는가? 헤겔이 인류사에 끼친 공적이 무엇인지 아느냔 말일세. 첫째는 히틀러요, 둘째는 막시즘이야. (중략) 김 군은 내가 설명하는 기독교 복음이 너무 단순하여 무책임한 진리라고 말하지만 진리란 본래 단순한 것일세. 인간의 사변은 복잡하나 신의 진리는 단순하단 말이야. 언제나 인간은 단순한 진리를 가까이에 두고서 멀리 가서 추상과 논리의 체계를 세워 왔단 말이야. 결과적으로 인간은 자신이 세운 복잡한 사상과 질서 속에서 스스로 길을 읽어버린 거야."
요즘 철학에 관심이 많아진 내게 일침을 가하는 대화 내용이었다. 철학책은 읽으면 읽을수록 정말 난해하고, 다람쥐 쳇바귀 도는 기분이 들었다.

에베소서 1장7절에서 큰 깨달음을 얻는 저자는 신학대학원에 진학했으나 그의 성격에 맞지 않았다. 그는 입으로 설교하는 목사가 아니라 몸짓으로 증거하는 예수의 제자가 되고 싶었다고 한다.  X철공소에 일하면서 70년대 노동 현실을 철야 교대 근무 중 화상을 입어가며 깨닫게 된다. 사장을 비롯하여 임원 대부분이 기독교인이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베풀며 가는 모습과는 동떨어져 있는 그들을 보며 큰 실망과 좌절을 겪는다. 노조를 만드려는 그를 '빨갱이'라고 치부하는 그들의 모습은 어찌 지금과 하나 변한게 없을까. 그가 그린 청계천의 모습은 2009년 현재 한국 사회의 빈곤층 모습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한국 사회가 발전하였지만 아직도 치유되지 않은 상처가 너무 많다.

젊은 날 김진홍 목사는 무모할 정도로 용감했다. 만약 예수님이 한국에 오신다면 한국에서 가장 소외받는 계층이 거주하는 청계촌(송정동 판자촌)에 온다는 믿음 하나로 그는 그들에게 예수를 알리러 빈민선교를 시작한다. 그의 실행력/용맹함/패기는 위대하다고 느낄 정도로 그가 청계천에서 겪은 고초는 엄청났다. 빈민선교를 하며 처음에는 빈민촌 사람들에게 음식/치료를, 그 다음에는 공동체를 통해 경제적 자립/인권을 주려하였지만 그들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근본적으로 그들의 삶은 더 행복하지 않았던 것이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자신의 잘못된 과거/행동은 항상 쉽게 잊는다. 그의 좌절은 다음 구절에서 드러난다:
"폐병, 성병, 피부병, 영양실조, 실업자, 어린이노동, 굶주린 눈, 싸움질, 술주정, 겨울추위, 여름더위, 연탄가스, 습기 찬 방, 악취, 오물, 철거반, 절도, 강간, 게으름, 무기력.... 예수는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할 능력이 있는가? 능력이 있으면 왜 보고만 있는가? 왜 침묵하는가? 능력이 없는 건가? 실제는 아무것도 없는데 마치 무엇이 있는 것처럼 장식만 한 것인가? 신기루 같은 허상인가? 예수께서 만일 그런 능력이 없다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건가? 나는 어떻게 해야 되는 건가? 따져들면 따져들수록 모든 것이 모호하고 의심스럽기만 했다."
그는 전부를 부정하고 의심해도 한 가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것은 '예수는 나의 구주'란 사실이었다. 예수가 그를 죄와 허무, 방황과 무의미에서 구원하셨다는 사실은 절대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고 한다. 마태복음 4장 4절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에서 이에 대한 해답을 찾았다. 사람들은 항상 새 옷, 새 직장, 새 조직 등의 새로운 것을 찾지만 문제의 뿌리는 새로운 사람, 새로운 영혼이다. 자본주의 사회에 사는 우리 모두에게 행복은 오직 화폐 안에 있지 않음을 다시 한번 확인해준다. 그는 문득 대학 시절, 철학이란 어떻게 죽느냐를 공부하는 학문이라고 이야기한 교수가 떠올랐다고 한다. 그리고 웃으며 죽을 수 있다는 것은 크나큰 축복이라고 스스로 생각했다고 한다. 구약성경 시편 57:7-8 말씀으로 이 책은 끝맺음을 짓는다.

이 책의 이야기는 아직 현재진행형이다. 뉴라이트 운동을 한 때 활발히 했던 목사님의 현재 모습과 책 속의 얼굴은 너무 달라 약간 혼란스럽기도 했다. 자본주의를 움직이는 거대한 힘(화폐/기업/언론/전쟁/분쟁)에 의한 악보다 선이 많다고 판단하셨던걸까. 아마 그 의문은 목사님의 다른 책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겠지.
어쨌든 이 책은 철학 이론과 삶 속 깨달음을 통해 기독교에 대한 나의 의문을 시원하게 해결해주었다. 중요한 점은 나는 목회자가 아니며 목회자가 될 생각 없는만큼, 나만의 방식으로 부끄럽지 않은 기독교인이 되어야 한다. 솔직히 나는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지 아직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당당히 이야기할 수 없다. 무엇인가 이루기위해서는 나 자신을 거기에 던져야 한다. 나는 어떤 방식으로 예수님에게 나 자신을 던질 것인지 고민 중이다.

나의 액션 플랜은:
존경받는, 사랑을 베푸는 기독교인이 되자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살다가, 죽을 때 환하게 웃자^^^




 





반응형
Posted by ThyArt
l